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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의 언어

2026. 02. 09

기억.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다시 떠올리는 이것은 상상력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이따금 우리는 경험한 것인지, 느꼈던 것인지 정의하기 모호한 것들을 떠올리고는 한다. 기억을 프로이트적으로 설명했을 때 ‘무의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것 또한 기억이라고 한다.우리의 기억이 어떻게 확장되는가를 보여줌에 따라 상상력의 깊이가 하나의 콘텐츠가 된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작품은 이미 여러 곳에서 소개된 적 있는 작가의 개발품 ‘타임 엔진’에서 출발하는데, 비디오 게임 엔진과 인공지능, 가상 세계를 결합한 디지털 시뮬레이션 도구이다. 작가는 건축, 생태계, 사회 조건 등 변화하는 세계를 디지털 공간에 구축한 뒤, 이곳에서 생성된 가상 조각들을 다운로드하여 현실 세계에 물리적 형태로 구현한다. 이 가상 조각들은 금속, 플라스틱, 흙, 나무껍질 등 유기적이거나 무기적인 재료가 겹겹이 쌓인, 인간과 기계의 노동의 흔적이 내재 되어 있는 재료들이다.

인류와 인류끼리의 교류, 발전을 통해 기술을 만들어 내고, 생태계의 순환을 통해 지구가 유지되는 근본적인 개념을 전복하면서, 익숙하지만 터무니없는 물질들의 조합으로부터 인류의 멸망이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담론을 제시한다. 작가는 사실과 허구가 맞물린, 그러니까 자발성과 비자발성이 겹친 높은 텐션의 상상력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듯하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 적군의 언어》는 지난 9월 3일부터 이듬해 2월 1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첫 한국 개인전이다. 주로 장기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그의 작품 스타일을 보여주듯 이번 전시 또한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건물 전체를 아우르는 큰 스케일을 선보인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장소 특정적 미술’이라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는 기후, 온도, 관객들의 관람 방식 등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장소 자체가 작품의 재료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품 방식은 작가의 전시 제작 특징과도 연결된다. 로하스는 주로 대형 설치 작품을 제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전시될 지역의 재료를 사용하는데, 이번 전시 또한 한국의 소나무를 함께 사용했듯이 지역의 특징, 장소의 특징 그 자체를 마치 커다란 재료로 쓰는 것도 주목해볼 만한 점이다.

하나의 유적지, 또는 상상 속 미래의 폐허라는 낯선 세계를, 관객들은 직접 경험하고 탐험하며 생성과 소멸의 SF적 서사를 목격하게 된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는 인류의 지속 가능성이 불분명해진 위기 속에서 결국 ‘적군’-AI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에게 지배당해 황폐해진 인간들의 공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 인터뷰에서 로하스는 자신의 쇼는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미술관의 다른 가능성과 그것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를 증명하듯, 해당 전시는 인류의 발전과 인류의 종말 그 어딘가의 경계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탈-인류세’ 시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적군의 언어’라는 전시 제목도 상당히 흥미롭다. 여기에서 말하는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언어와는 다른 것을 의미할 것이다. 전시장 곳곳의 인류의 흔적이 묵살되고 배제된 것, 이 침묵 그 자체로 관객들은 이들만의 언어를 체험한다.

전시는 미술관 정문 옆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시작된다. 계단에 놓인, 작가가 본인의 서명처럼 쓰는 아르헨티나의 오르네로 새의 둥지를 보며 내려가면 마치 폐공연장처럼 비닐이 덮이고 조명이 꺼진 아트홀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익숙한 공간이면서도 본래의 의도를 해체하듯 일종의 괴리감으로 다가온다. 비상 계단을 통해 올라오며 살짝 습기가 더해진 공기 냄새를 맡다 보면 어마어마한 양의 흙으로 가득한 로비와 1층 공간을 볼 수 있다. 봉쇄된 입구, 콘크리트가 보이는 벽, 이 자리에 오래 있던 듯 싹이 나고 있는 감자와 고구마, 그리 쾌적하지 않은 온도와 습도. 마치 바깥의 정원이 미술관 안으로 확장된 것 같은 느낌에 인간이 만들어 낸 공간에 인간이 방문객이 된 것처럼 조심조심 살펴보게 된다. 1층부터 우리 인류는 우리를 둘러 싼 이 환경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류세’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인해 지구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한 시대를 의미하며, 인간이 지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금을 시대 구분적으로 지칭해야 한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다. 인류세 시대에는 인류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미술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부터 봉쇄한 흙에서부터 우리도 모르는 새에 계속해서 번지고 있을 미생물들, 덥고 습해서 얼굴을 찡그리게 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들여옴으로써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돌아보게 하는 설정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서부터 숨이 턱 막힌다. 알 수 없는 쾌쾌한 냄새와 아까보다 더 한 습도 때문에 한여름의 장마를 다시 경험하는 기분이다. 2층의 작품이 있는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높은 문지방 같은 곳을 넘어야 한다. 방과 방 사이를 나누고 있는 이 네모난 구멍과 그 옆의 벽들은 포토샵의 빈 캔버스에 쓰이는 바둑판 무늬가 덮여 있다. 이로써 작가는 자신이 그려놓은 디지털 좌표와 세상 속에 관객을 초대하는 것이다. 마치 작가가 현실 세계의 우리를 이 가상의 캔버스에 넣음으로써 우리가 디지털 공간, 미지의 공간, 가상의 공간에 작품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을까.

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무게감을 주고 있는 작품은 <상상의 종말> 연작이다. 소나무들 사이에 다양한 종류의 재료로 이루어진 거대한 우주선 혹은 기계 덩어리, 찌그러진 로봇과도 비슷한 형체들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중력의 법칙’이라는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 관람자의 인식을 전환시키면서 일종의 ‘역전감’을 만들어 내고 이것이 이 작품의 텐션을 더욱 높이고 있다. 어디에서부터가 시작인지 알 수 없는 이 작품은 마치 기욤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램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인류가 알고 있는 이 세계의 문법을 뒤집어 공간의 배열을 작품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역할로서 표현하는 것. 색다른 문법으로 쓰인 미래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드는 장치인 것 같다. 이 색다른 문법의 근원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타임 엔진’이다. ‘타임 엔진’은 비디오 게임 엔진과 인공지능, 그리고 가상 세계를 결합한 일종의 디지털 시뮬레이션 도구이다. 작가는 이 디지털 공간에 변화하는 생명체, 건축 등이 섞인 세계를 구축한 후, 생성된 가상 조각들을 현실 세계에 구현한다. 가상 조각들을 이루는 재료들은 주로 금속, 콘크리트, 흙, 나무껍질 등 유기적·무기적 재료의 복합체이다. “나는 세계를 모델링하고, 그 세계는 나를 위해 ‘조각’을 모델링하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은 디지털 세계에 이미지로 존재했던 것을 실제화시키는 타임 엔진의 원리를 잘 설명하고 있다. 타임 엔진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로하스의 작품 세계를 투영하고 있다고 보면 좋다. 로하스와 세계가 서로 모델링한 것들의 결과물은 인류 문명의 계속적인 발달과 성취가 아닌, 폐허, 소멸, 침묵 등 일종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는 보기’처럼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미래의 한 부분을 전제로, 인류 문명이 ‘유물’에 불과한 상태가 되어가는 것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인류가 아닌 누군가가 <상상의 종말> 연작처럼 유기물과 무기물, 인간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위계가 파괴된 복합체들을 보게 된다면 과연 그들은 인류 문명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정의할 것인가?

순서상 먼저 말했어야 했지만 다시 1층으로 내려가 보자. 흙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큰 로봇 조형물을 볼 수 있는데, 나사에서 달 탐사를 위해 만든 로봇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엘 핀 데 라 이마히나시온 Ⅲ (상상의 종말 Ⅲ)>이다. 오른쪽 발에는 아폴로 11호 착륙 당시 닐 암스트롱이 신었던 부츠를 신고 있고, 왼쪽 손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 중심 문명을 상징하는 다비드 미니어처를 쥐고 있다. ‘훼손된 독창성의 고발’. 이 말이 떠올랐다. 이 로봇이 들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가장 완벽한 인간의 아름다운 형상을 띠고 있으며, 르네상스 정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즉, 거대하고 추상적인 ‘대문자적인’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은 로봇, 그러니까 어쩌면 미래 세대의 정복자가 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기계 덩어리에 의해 한 순간에 복제품, 미니어처, 흙먼지 속으로 들어가게 될 진부한 물건으로 뒤바꼈다. 대문자적 상상력의 독창성이 훼손되어 그 유한함이 폭로되는 순간인 것 같다. 인간의 유산이 자연 또는 기계에 정복됨을 확인하면서부터 우리는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이후의 세계, 탈-인류세의 세계를 상상하는 ‘소문자적’인 상태로 거듭나게 된다. 추상적이고 소문자적인, 아직은 터무니없게 느껴질 수 있는 것들이 훼손된 대문자적인 것들을 대체하면서 진정으로 독창적인 상상력의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드리아 비야르 로하스는 전시 제목이기도 한 ‘적군의 언어’를 통해 적군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고 전한다. 앞서 말했듯, 이 언어는 문자와 기호로 이루어진 언어를 넘어서서 침묵하게 된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또 다른 소통 방식이다. ‘적군’은 위협적이고 완전히 타자의 영역에 자리하며 적대적인 이미지를 주지만, 로하스가 말하는 ‘적군’은 “우리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한 거울”이기도 하다. 인류가 처음으로 그들 자신을 인식하게 됐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 인류가 그 전의 인류들로부터 자신들을 마주하게 됐다는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로하스의 타임 엔진으로부터 출력된 적군의 언어는 인류의 흔적을 해체하며, 인류 이후에 맞이할 새로운 세계의 소통 방식을 제안한다. 어쩌면 ‘적군’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멸망시키고 종말 시키려는 존재라기보다, 새로운 상상력의 구체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길잡이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다시금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