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MA, CHAPTER FIVE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에서 개최된 현대미술 소장품 특별전 《APMA, CHAPTER FIVE – FROM THE APMA COLLECTION》은 동시대 미술이 지닌 다원적 언어와 매체 실험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조망하는 자리이다. 이번 전시는 국내외 작 가가 약 80여 점의 방대한 소장품을 선보이며 현대미술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는 단일한 형식에 갇히지 않고, 각기 다른 문화적·역사적 맥 락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해 온 ‘예술적 실험’의 결과물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관람은 서로 다른 문화 또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동시 대 미술의 조형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 다양한 예술적 실험에 초점을 맞추어 1970~80년대 단색화와 실험미술부터 최근 매체 실험까지 이어지는 한국 현대미술 의 형성과 전환 요소를 탐구하는 데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많은 작품 중 내가 다루고 싶은 첫 번째 작품은 키키 스미스(Kiki Smith)의 <하늘(Sky)>(2012)이다. 몇 년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자유 낙하>라는 제목으로 개최되었던 키키 스미스의 개인전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생명과 죽음, 신체와 자연 을 신화적인 표현법으로 다루는 그녀만의 작품 세계에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금 되살아났다. 해당 작품은 타피스트리(tapestry)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다채로운 선염색사 로 짜서 만드는 실내 장식물로, 이 작품 또한 자유로운 패턴과 다양한 질감 표현이 특징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과거 그녀의 페미니스트적인 조각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살과 뼈에 대한 탐구, 에이즈 위기 등에 대한 상징 세계와는 사뭇 다른 특징을 지닌다. 키키 스미스는 사물을 이미지로서가 아닌, 관념으로서의 의미로 바 라본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사물에 매료되는 이유라고 하는 그녀의 사유는 인간, 동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탐구와도 연결된다. 사물을 고정된 시각적 이미지로 소비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 의미와 관념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동양미 학의 ‘물아일체’ 및 ‘주객통합’의 사유와 깊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인간과 동물, 자 연이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타피스트리 화면 안에서 촘촘한 실실이로 엮여 있는 조형적 형태는, 만물이 거대한 우주의 흐름 속에서 상호 의존하며 존재한다는 - 2 - 동양의 유기체적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특히 전통적인 서구 미술이 캔버스 위에 대상을 재현하는 ‘재현의 미학’에 충실했다면, 실을 교차시켜 형상을 짜 나가는 타피스트리 기법은 행위의 반복과 시 간의 축적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는 인위적인 가공을 최소화하고 재료 본연의 성질과 작가의 신체적 노동을 일치시키려 했던 동양적 정신성, 그리고 사물의 본질 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비움의 미학과 연결된다. 결국 키키 스미스의 현 대적 작업은 동양 미학이 박제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서구 현대미술이 도달한 고도의 관념적 사유를 해석하고 보완할 수 있는 살아있는 현대적 패러다임임을 증 명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불(Lee Bul) 작가 또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비밀공유자(The Secret Sharer)〉(2012)는 키키 스미스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반려견이 죽기 전 크리스탈 조각들을 토해 내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멀리에서 보면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스펙터클이 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것이 날카로운 유리 구슬과 거울 파편, 즉 고통과 상실 이 파편화된 위태로운 실체라는 점이 드러나며 실존의 위태로움과 상실의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불의 사이보그 연작이 외견상 절단된 듯 보이지만, 부유하고 떠다니는 존재로 표현된 것처럼, 이 작품 또한 사적인 상실로 인해 산산조각 난 신 체와 기억이 역설적이게도 물리 법칙의 구속을 벗어나 있는 전환을 보여준다. 강력 함이 해체된 탈중심적, 탈경계적 존재로서 제시되어 있으며, 이는 한국 현대미술의 독창적인 해체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이 탈중심적이고 탈경계적인 해체성은 동양 철학의 비평서인 《문심 조룡(文心雕龍)》에 흐르는 예술관을 통해 더욱 깊게 해석된다. 진정한 창조란 무(無) 에서 새로운 형상을 발명하는 서구적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우주는 한 순간도 정지 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처럼 자연이 스스로 변해가는 끊임없는 리듬과 생동감을 이 어받아 ‘나의 방식’으로 발현하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불이 감행한 매체 실험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가장 깊 은 원점으로 돌아가 진실한 생명력을 회복하는 ‘원창(原創)’의 미학과 만난다. 작가 에게 반려견의 죽음과 구토라는 극단의 상실은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이자 원점이 다. 서구적 시각에서 이는 파괴나 소멸이겠지만, 동양적 사유 안에서 작가는 이 비 천하고 유약한 생명의 흔적을 영롱한 크리스탈이라는 광물적 물성으로 치환하며 천 지 고유의 순환적 리듬을 복원해 낸다. 즉, 상실의 고통을 통해 존재의 원점과 다시 접속하고, 이를 거울과 크리스탈이라는 현대적 매체를 빌려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 형 언어로 분출해 낸 것이다. 결국 고정된 형태에 안주하지 않고 매 순간 빛을 반사하며 공간을 유영하는 〈비밀공유자〉의 역동성은 박제된 과거의 정형성을 깨부수고 근원적 생명력의 유동 성을 회복하려 하며, 동양미학이 오늘날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고 서사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